세계 질서의 변화
비등한 국력을 지닌 두 개 이상의 국가가 맞서 싸우다가 어느 한쪽이 승리하여 새로운 규칙, 즉 새로운 세계 질서를 확립할 만큼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섰을 때 비로소 세계 질서가 바뀐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신흥국은 기존의 지배국에 비견할 만한 국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강대국은 강대국이 되기 훨씬 전부터 부상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강대국은 더 이상 강력한 국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더라도 계속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러한 현상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 중국 제국의 사이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제국은 우위를 점하기 훨씬 이전부터 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먼저 교육적, 제도적, 기술적 강점을 구축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의 경쟁력, 교육, 혁신, 기술 수준은 1600년대 초반에 급격히 상승한 후 1600년부터 1800년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이러한 노력은 영국의 생산량, 세계 무역 점유율, 군사력이 함께 증가하면서 1700년부터 1900년까지 많은 성과로 이어졌다.
전형적인 시차와 함께, 영국의 금융시장과 금융 중심지를 세계 선두주자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한 금융 발전이 뒤따랐으며, 이후 더 오랜 시차를 두고 파운드화가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 잡으며 네덜란드 길더화를 앞질렀다.
1700년대 후반에 영국의 주요 무역 금융 경쟁국이었던 네덜란드가 몰락했지만, 1800년대 초반까지 영국은 강대국을 완전히 올라설 수 없었다. 바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가 마지막까지 강력한 경쟁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을 정복하고 프랑스를 최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반적인 형태의 강대국 간 대립과 권력 주장에 따른 불균형을 불러왔으며, 동맹과 전쟁이 단계적으로 확대되면서 국가 간 갈등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이번 장의 후반에 영국 제국의 성장을 설명하고 상징적인 프랑스 사례를 간략히 다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핵심만 지어보려 한다. 영국은 사실상 경제 전쟁과 군사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한 전쟁을 치른 후에 전형적으로 전개되는 빅 사이클 각본에 따라 승전국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했고, 오랫동안 영국 제국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영국은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의 인구가 세계 인구의 2.5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계 총소득의 20퍼센트 이상을 생산했고 전 세계 광활한 토지의 20퍼센트 이상과 세계 인구의 25퍼센트 이상을 다스렸다.
그럼 시대별로 차근차근 짚어보기로 하자. 영국이 부상하기 시작한 1600년경부터 살펴보자. 영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려면 1600년대 말 영국과 유럽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초, 영국과 유럽에서 벌어진 대규모 분쟁은 이전의 모든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뒤집어 놓았다. 3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유럽에서는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30년 전쟁은 이념, 종교, 경제 계급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새로운 유럽 질서를 세우는 토대를 마련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들이 탄생했고, 각국이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하면서 유럽은 분열했다. 영국 제국은 부와 권력을 둘러싸고 여러 형태의 갈등을 겪었다. 계급 간 투쟁으로 볼 수 있는 잉글랜드 내전이 수 세기에 걸쳐 잔인하고 격렬하게 이어졌고, 네덜란드 통령을 지낸 빌 셈 3세를 유혈 사태 없이 영국의 국왕으로 추대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공통적으로 군주제를 약화시키고 의회의 권력을 강화했으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왕국의 관계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냈다. 특히 잉글랜드 내전을 계기로 왕은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반란을 주도한 지휘관 올리버 크롬웰의 통치 아래 군주제가 폐지되고 잉글랜드 연방이 수립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분쟁을 거치며 군주제에서 벗어나 법치주의를 확립했으며 왕과 의회 사이에 새로운 권력 균형을 이루어 훗날 제국으로 올라서는 토대를 마련했다.
영국 의회는 강력한 권력을 앞세워 실력 중심으로 국가 지도자를 선축하는 체제를 적절하게 허용했고, 총리는 왕실이 아닌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했다. 윌리엄 피트와 그의 아들 월 피트, 로버트 필, 윌리엄 글래드스턴, 벤저민 디즈레일리 등 많은 정치인들이 뒤를 이어 영국의 부상과 전성기를 이끌며 기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은 모두 지주 귀족이 아닌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의회의 이러한 혁명적 강화는 1600년대 후반부터 유럽 전역에 퍼졌던, 누가 어떤 권한을 가져야 하는지, 정부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계몽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것은 영국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기 과학 사상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새로운 인간 중심 철학의 핵심은 사회가 이성과 과학에 근거해야 하며 정부의 권력은 신이 아닌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고방식에 있다.
이 시기에는 토론과 회의가 권장되었다. 기초 교육이 개선되고, 인쇄물을 통해 사상이 보급되고, 국경을 초월한 엘리트 계층이 늘어나면서 정시 사회사상을 논할 수 있던 새롭고 폭넓은 '공론장'이 마련되었다. 당시 주요 사상가들은 서구권에서 오늘날까지 중요하게 여기는 주요 사상과 개념을 만들어냈다.
계몽주의 사상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같은 독재 군주부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채택한 대의 정부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국가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은 특히 계몽주의의 강력한 정치 제도와 법치주의가 제공하는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계몽주의가 강조하는 과학과 그에 근거한 주요 발견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강점은 즉각적으로 번영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차 법치주의를 존중하는 영국의 체제가 강력한 교육과 결합하면서 영국은 상업과 혁신 분야에서 경재 우위를 확보할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이는 영국 제국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영국은 중앙 집권화된 강력한 재정 당국을 설립하여 재정적으로 탄탄해졌고, 덕분에 경쟁국보다 훨씬 더 많은 세수를 거둘 수 있었다. 18세기까지의 영국의 세금 부담은 프랑스의 거의 2배에 달했다.
1694년에 설립된 영란은행은 영국 정부 부채의 유동성을 표준화하고 규모를 늘려 차입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개혁 조치와 더불어 국채 수익률은 1700년대 초반에 다른 국가들보다 급격하게 하락했다. 1700년대 초까지 제국의 부상을 암시하는 전형적인 징후들이 많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