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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자본시장 사이클

by 큰바구니 2024. 1. 16.

네덜란드의 자본주의의 발명과 부작용

 

네덜란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의 국민과 인류 모두에게는 엄청난 일이었지만 위대한 발명이 그러하듯 동시에 치명적인 부작용도 발생했다.

 

생산 활동, 무역 그리고 사유 재산은 전부터 내려온 제도였지만 많은 사람이 주식시장처럼 회사의 소유권 지분을 구입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의 상장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1602년에는 최초의 주식시장을 개설했다. 다른 발명과 마찬가지로 이런 자본시장의 발전을 자신들의 필요와 이익 추구 때문에 생겨났다.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는 항해는 위험을 내포했으므로 상인들이 미래 이익의 일부를 주는 대가로 위험한 항해를 팔아 위험을 분산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네덜란드가 1500년대 중반에 항해 사업에 주식 출자 제도를 도입한 것은 정말로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1600년까지 이런 주식은 소수의 상인들이 독점해서 투명성이 부족했고, 현금화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외부 투자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었다. 1602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상장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이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식의 소유와 양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정립되면서 시장은 더욱 투명해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혁명적인 발명품이었다. 세계 최초의 다국적 회사로 현대 주식회사의 특징인 주주, 회사 로고, 이사회 등을 갖추고 있었다.

 

자본시장 덕분에 투자자 들은 투자가 가능했고, 상인들은 자금 모집을 할 수 있었으며, 모든 사람이 쉽고 편리하게 자산을 사고팔 수 있었기에 부의 축적이 가능했다. 1700년대 초 가장 높을 때 동인도 회사의 배당금은 네덜란드 GDP의 1퍼센트에 육박했다.

 

무엇보다 네덜란드는 유럽과 아시아, 특히 수익성이 좋은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무역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유럽 최대의 교역국으로 떠올랐다.

 

주식시장 개설 외에 네덜란드는 혁신적인 은행 시스템을 도입해서 네덜란드와 외국 상인들의 국제 무역을 금융 면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전의 국제 통화 체제는 엉망이었다.

 

1500년대 말에 네덜란드 내에는 800여 개의 국내외의 주화가 유통되었지만, 대부분 불순물을 섞어 질이 떨어졌으므로 위폐와 다를 바 없었다. 화폐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국제 무역이 빨리 성사되지 못하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러다 1609년 신뢰할 수 없는 유통 화폐로부터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환 은행으로서 암스테르담은행이 설립되었다. 이 은행은 금융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네덜란드 화폐, 은행의 신용장, 네덜란드의 금융 시스템을 도입해서 전 세계 금융의 중심 역할을 도맡았다.

 

이 네덜란드 화폐는 경화로 지급 보장이 되는 제2유형의 화폐였다. 이로써 길더화는 세계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이 시스템으로 길더화는 교환 수단이자 부의 축적 수단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암스테르담은행이 발행한 환 어음은 기축통화로 그 지위가 격상되어 발트해와 러시아의 상인들은 길더화와 암스테르담은행의 환 어음으로 가격을 산정하고 거래 대금을 지불했다.

 

이런 와중에 30년 전쟁(1618~1648)이 발발했다. 유럽의 많은 국가가 얽힌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이 전쟁이 유럽 국가들의 국내외 질서에 미친 영향이 워낙 광범위하므로 어느 정도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다. 30년 전쟁은 국내의 질서가 동시에 변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여기에는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요소들이 모두 동원된다. 30년 전쟁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의 전형이지만 다만 그 기간이 길었던 것뿐이다. 한쪽에서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가톨릭을 신봉하는 황제가 독일의 가톨릭 영토와 스페인 및 교황령과 연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는 개신교를 신봉하는 독일 귀족들이 각각 시기는 상이하지만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프랑스와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 전쟁은 돈, 종교, 그리고 지정학적인 목적으로 벌어졌다. 연대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예를 들면 가톨릭을 믿었던 프랑스 왕정은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정사를 맡겼지만, 루터교를 믿는 스웨덴과 대다수가 칼뱅주의자인 네덜란드와 연합했다. 이는 종교 이념보다 돈이나 지정학적 이유가 더 중요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