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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와 식민주의 무역

by 큰바구니 2024. 1. 16.

부를 찾아 전 세계를 여행한 유럽인들

 

대항해시대는 1400년대 유럽인들이 부를 찾아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최초로 접촉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 세계는 좁아졌다. 그 시기는 르네상스시대와 거의 비슷하다.

 

르네상스시대 기술의 발전이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을 불러왔고 이렇게 건조된 배들이 가져온 부가 다시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배 가문은 수익성 있는 항해의 후원자가 되어 탐험가들과 상당한 이익을 나누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 왕자인 엔히크 항해 왕자는 초기 항해를 후원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무역 제국을 건설했다.

 

스페인이 그 뒤를 이어 신속하게 광물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찾아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제국을 그 뒤를 이어 신속하게 광물자원이 풍부한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제국을 포함한 서반구의 상당 부분을 점령해서 식민지화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경쟁국이었지만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은 널렸으므로 분쟁이 발생한다고 해도 재빨리 합의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되고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는 은 광산을 소유하게 되면서 1500년대에는 스페인이 포르투갈보다 강력해졌고, 1500년대 말부터 약 60년간은 합스부르크의 왕이 포르투갈을 통치했다.

 

풍부한 부를 바탕으로 두 나라 모두 예술과 과학 기술의 전성기를 통치했다. 충분한 부를 바탕으로 두 나라 모두 예술과 과학 기술의 전성기를 맞는다. 스페인 제국은 너무나 광활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표현은 후에 대영제국을 표현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유럽 각국이 항해로부터 얻는 수익이 더욱 커지면서 무역이 국가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특히 부의 유입으로 생필품과 서비스 가격의 인상이 촉발된다.

 

스페인 가격 혁명이라고도 불린 이 현상으로 유럽에서는 수백 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물가가 수십 년마다 2배씩 폭등했다. 이는 최근에 경험한 일들로만 판단해서는 절대 예측하기 어려운 경제적 충격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럽은 대상을 확대해 아시아, 그중에서도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를 무역과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전에도 마르코 폴로 같은 탐험가들이 다녀간 적이 있기는 하지만 포르투갈이 1513년에 최초로 중국의 문을 두드렸다.

 

유럽인들은 중국의 도자기, 비단 같은 제품에 매료되어 더 많이 찾았으나 중극은 유럽산 특산물을 별로라고 생각해 구입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결제 수단으로 오직 은을 받아들였다.

 

당시 중국과의 무역에 지불하기에는 은이 부족했고, 중국은 다른 상품에는 관심이 없었다. 은 부족 사태는 결국 아편 전쟁과 다른 사건으로 이어진다.

 

명나라에는 중국식 대항해시대가 있었지만 중단된다. 1400년대 초에 명나라의 영락제는 가장 신임하는 제독 정화에게 명령하여 7차례에 걸쳐 전 세계를 도는  '정화의 원정'을 하도록 했다.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항해가 아니었으므로, 중국의 전 세계에 떨치는 것에 만족했다. 원정대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앞선 해군력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유럽은 한 세기 후에나 이런 규모의 선박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의 숫자에 나타나듯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급속히 증가했으나 명나라는 원정을 중단하고 안으로 틀어박혔다. 원정에 드는 비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필요한 모든 것이 중국에 있으므로 원정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이로 인해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쇄국이라고 불린 고립의 시대가 도래했다. 수백 년간 중국과 일본은 외국에 대한 개방 정책에서 고립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1500년대 유럽에는 개신교의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여러 전쟁이 발생했고 당시 유럽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유럽의 질서는 군주, 귀족, 그리고 교회가 공생하는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개 개혁은 가톨릭교회의 권력을 무너뜨려 부패를 척결하고 중간에 교회를 배치한 채 신과 직접 소통하는 독자적인 종교를 추구했다.

 

가톨릭교의 주교와 고위 성직자들은 마치 왕처럼 궁에서 살았으며 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했다. 가톨릭교회는 종교적이면서 그 자체가 국가로서 실제로 오늘날 이탈리아의 상당한 면적을 직접 통치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해서 교황의 권위와 성경 해석권 독점에 도전하면서 시작되었다. 루터는 주장을 철회하라는 교회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단자로 낙인찍혀 파문 당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과 여타 신학자들의 생각은 귀족들의 지원과 새로운 인쇄술의 힘으로 유럽 전역에 뿌리내렸다. 늘 존재했던 권력 투쟁과 더불어 종교개혁은 유럽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렸다.

 

종교개혁은 주요 가톨릭 국가에 영향을 미쳐 내부 갈등이 확대되고 사회의 불안정성이 더 커졌으며 국가 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