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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이클로 본 미국과 달러화의 부상

by 큰바구니 2024. 1. 16.

미국 달러와 자본시장의 오랜 상승

 

전 세계에 군림하는 기축통화가 되기 위하 미국 달러의 여정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미국이 탄생한 후 첫 100년 동안 미국의 금융 체계는 충분히 개발되지 못했다. 미국의 은행 업무는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경화가 은행에 투입되었고, 은행들은 실제 보유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대출해 주었다. 이러한 다단계 사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은행들은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고 돈의 가치는 평가절하되었다.

 

미국에는 금융시장을 통제하거나 최종 대출자 역할을 맡을 중앙은행이 없었다.  미국은 많은 호황/불황 사이클을 거쳤는데, 부채로 조달한 투자 광풍이 불면서 호황이 지나치게 확장되어 결국에는 신용 손실과 신용 경색을 초래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이어졌다. 당시 금융 공황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1863년과 1913년 사이에  뉴욕에서만 8건의 금융 공항이 발생했으며, 지역 금융 공황도 흔하게 발생했다. 당시 은행 체계는 고도로 분할되어 통화량이 경직되었고, 예금 보험이라는 것도 없었으며, 피라미드형 준비금 체제로 인해 은행 한곳이 위험해지면 다른 은행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칠 위험이 컸다.

 

뉴욕은 런던과 마찬가지로 세계 금융 중심지가 되기 전부터 이미 무역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20세기 접어들고 나서야 금융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1913년에는 세계 20대 은행에 미국 은행 두 곳만이 13위와 17위로 이름을 올렸다.

 

반면 영국 은행은 9곳이 순위에 이름을 올렸고, 상위 5위권에 3곳이나 포함되었다. 이 시점에 미국은 경제 생산량에서 영국을 크게 넘어섰으며 수출 시장 점유율에서는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새로 떠오른 금융 중심지 뉴욕에서 비롯된 가장 중요한 금융 혁신 중 상당수는 대규모 무역 중심지의 수요에 맞춘 서비스였다. 투자 은행은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고, 1800년대에 자본 청산 기관으로 등장했다.

 

자본 대부분은 유럽에서 유입되어 당시 미국에 호황을 일으켰다. 이전의 런던과 마찬가지로, 뉴욕에서도 보험 회사가 은행보다 더 빠르게 발전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대형 보험 신탁 회사의 규모가 대형 은행보다 컸다.

 

미국 경제가 유럽과 영국 시장보다 더 역동적이고 빠르게 변화했다는 사실은 미국 남북 전쟁 직후부터 호황을 누리던 미국 주식시장에도 반영되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세기 후반은 평화와 번영이 이어진 호황기였고, 2차 산업혁명, 도금시대, 강도 남작 시대로도 불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자본주의와 혁신이 번성하면서 부의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졌고 부정부패가 만연해져 사회적으로 분노가 쌓인 시기였다. 사회적 반발은 1900년경에 시작되었고, 1907년에는 한차례 부채 문제가 터지기도 했다.

 

이처럼 혼란이 이어지자 1913년 연방준비제도로 불리는 미국의 중앙은행 체제가 탄생했다. 1910년, 미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영국을 넘어섰다. 1901년에 설립되어 15년 만에 가장 가치 있는 미국 기업이 된 US 스틸과 같은 새로운 기업 부분도 빠르게 성장했다.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18년 끝이 났다. 전쟁이 그렇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은 전쟁 기간 대부분에 걸쳐 참전하지 않았고 전쟁 중에도 유일하게 금 태환성을 유지한 주요 국가였다.

 

전쟁의 여파로 유럽의 경제와 시장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유럽 정부가 취한 정책도 자국 통화에 대한 신회를 더욱 약화시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상대적인 재정 및 경제적 지위는 전쟁의 수혜를 입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연합국은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부채를 조달했기 때문에 전 세계 국채를 표시할 때 달러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전형적으로 짜인 시나리오처럼, 승리한 강대국들은 전쟁 후에 모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했다. 1919년 초, 파리 강화 회의가 6개월 동안 열렸고, 이어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전쟁에 패한 강대국들의 영토는 분할되었고 승전국들이 통제권을 쥐게 되었다.

 

패권국들이 승전국들의 전쟁 비용을 떠안게 되면서 승전국들에게 큰 빚을 져야 했고, 이러한 부채를 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은 고립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영국은 계속해서 세계 식민지 제국을 확장하고 감독하는 데 치중했다.

 

전쟁 직 후 통화 체제는 유동적이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금 태환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급격한 평가절하와 인플레이션을 겪은 후에야 금대비 통화 가치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세계 질서가 세워지고 나면 위대한 혁신과 생산성, 자본시장 호황에 힘입어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러한 상승기 말에는 상당한 부채가 쌓이고 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마련이다.

 

광란의 1920년대에는 투기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많은 부채가 생겨났다. 연준이 부채를 줄이기 위해 1929년대에는 투기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많은 부채를 줄이기 위해 1929년에 시행한 긴축 통화 정책의 여파로, 거품이 붕괴되고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대공황은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 경제적 고통을 안겼고, 이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가 간 부를 둘러싼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갈등은 10년 후에 벌어진 무력 전쟁의 도하선이 되었다.

 

앞서 6장에서 대규모 외부 구제 질서와 혼란의 사이클이 나타나는 전쟁 기간의 한 예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끈 사건들과 당시 전쟁 상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194년 연합군의 승리가 세계 질서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종전을 기점으로 부와 권력의 엄청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은 전쟁을 치르기 전과 치르는 도중에 다른 국가들에 많은 군수품을 판매하고 자금을 빌려준 덕분에 비교적 큰 수혜를 입은 승전국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전투는 미국 영토 밖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은 물리적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고 미국인 사망자도 다른 주요 국가보다 적었다.